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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 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 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번역자 : 미상
스티브잡스의 이 연설문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 같다.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다시 애플을 위기에서 구하기까지, 그의 발자취를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과 믿음이 만들어낸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포함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연설문을 읽고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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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0.05.14 06:01최종수정2010.05.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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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33년 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발사한 행성간(行星間) 무인 탐사선 ‘보이저 2호’가 이상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어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11일(현지시간) 독일 일간 빌트 온라인판에 따르면 보이저 2호가 요즘 보내오는 신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포맷으로 돼 있다고.
그러니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조차 이상한 신호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외계인의 비밀 메시지가 아닐까.
1977년 8월 20일 보이저 2호가 발사될 당시 NASA는 지능 있는 외계인들에게 발견될 것에 대비해 음악과 55개 언어로 된 인사말을 12인치 디스크로 담아 실었다.
90분 분량 음악 가운데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드비히 반 베토벤 등의 작품과 파도 소리, 새 울음 같은 자연의 소리가 포함돼 있다.
중량 722kg의 보이저 2호에는 온갖 장비, 메시지 전송기도 탑재돼 있다.
보이저 2호는 저속 비행하여 1979년 7월 9일 목성, 1981년 8월 25일 토성, 1986년 1월 24일 천왕성, 1989년 8월 24일 해왕성을 통과해 현재 무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동안 신호 전송이 중단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달 22일 처음으로 신호 포맷이 바뀌었다.
혹시 메시지 전송기가 오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후 보이저 2호에서 전송해온 과학 데이터는 전무한 실정이다.
외계인 헌터 하르트비흐 하우스도르프(54)는 “외계의 누군가 메시지 포맷을 다시 프로그램했거나 보이저 2호 자체를 하이재킹한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애초 보이저 2호가 오는 2020년까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진수 기자 commun@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브라질에서 붙잡혔다는 외계인 동영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온라인 매체인 로켓뉴스 24는 1분이 채 안되는 이 외계인 동영상을 게재하면서 “동영상이 현실적이며 산채로 촬영됐다는 점이 놀랍다”고 썼다.동영상 속의 외계인은 큰 머리와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평소 사람들이 상상하던 외계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몸을 기묘하게 꿈틀거리며 고양이 울음과 비슷한 소리는 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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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4/2010051401420.html
기사등록일 2010.05.10 황지혜기자 gotit@etnews.co.kr
미국에서 인기 영화를 개봉과 동시에 집에서 즐길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영화 불법복제를 막는 기술적 조치를 일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화사들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가정 시장을 열 수 있게 됐다”며 환영했지만 극장주와 가전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10일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FCC는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사들이 각 가정의 출력 상황을 원격 제어할 수 있는 ‘선택적 출력 제어(SOC: Selectable Output Control)’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SOC는 방송사가 영화를 공급할 때, 각 가정에서 녹화를 시도한다면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송출을 중단하거나 전송 품질을 떨어뜨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FCC는 그동안 SOC를 DVD나 블루레이로 출시된 영화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영화출시 90일 이전에만 적용토록 했다.
이번 제한이 풀리면서 영화를 극장 개봉과 동시에 거실에서 볼 수 있게 됐다. 영화사들이 불법복제 걱정없이, 신속하게 가정 시장에 유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대변하는 미국영화협회(MPAA)는 지난 2008년부터 SOC 규제 완화를 요청해왔다. DVD 매출이 떨어지고 가정에서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내려받는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저작권 우려 없이 유통할 방법이 필요해서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개봉 3∼4개월이 지나야 주문형서비스(VoD)나 DVD로 가정에서 볼 수 있다. <!–
–>MPAA의 밥 피사노 임시 회장은 “영화 산업계가 늘어나는 소비자의 수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번 FCC 조치는 여러 가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소비자가 디지털녹화장치 ‘티보’ 등을 이용해 원하는 시간에 방송을 보는 것이 제한된다. 또 극장주들은 영화 티켓 판매 감소를 우려했다.
가전사들 역시 반대 입장이다. 소비자가전협회는 “FCC의 결정은 가정의 기기를 방송사들이 제어하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소비자들의 선택권은 무시하고 영화 업계의 이익만 대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황지혜기자 gotit@etnews.co.kr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1005100053&mc=m_012_00001
기사입력 2010-05-11 오후 6:18:54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농기계를 이끌고 청와대로, 경기도청으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지난 2월 공권력이 투입되었을 때처럼, 1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끌려가리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청와대로 갈 것입니다. 갈 수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초로의 농민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트랙터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농지 보존·친환경 농업 사수를 위한 팔당공동대책위원회(팔당공대위)’ 유영훈 대표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생명의 땅’ 팔당을 지키고자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 그동안 몇 차례의 공권력 투입이 있었고, 그 때마다 농민들은 번번이 끌려가야 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수십 년 일궈온 농토를 잃게 된 팔당 농민들이 “이대로 농사짓게 해 달라”며 싸워온 그 1년 동안, 수백 명이었던 농민들은 이제 십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싸움은 기약이 없었고, 땅에서 빨리 떠나라는 정부의 압박은 점차 심해졌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11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두물머리 일대엔 새벽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경기도가 이날부터 4대강 사업 구간인 이곳 두물머리에서 토지 측량과 감정 평가를 실시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 ▲ 11일 4대강 사업 구간인 양평군 양사면 두물머리 일대에는 경찰과 농민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달 28일 국토해양부는 “주민 반발로 감정 평가를 하지 못하고 있는 두물지구에 대해 사업 일정을 고려해 최대한 빨리 감정 평가를 실시하겠다”면서 공권력 투입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국토해양부는 지난해 10월과 지난 2월에도 두 차례에 걸쳐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일대의 유기 농지에 측량을 위한 공권력을 투입한 바 있으며, 지난달 28일엔 팔당 유기 농지의 강제 수용 방침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공권력 투입은 없었다. 팔당공대위 서규섭 집행위원은 “어제 저녁 경기도에서 6월 지방선거 때까지 강제 측량을 실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고 말했다. 사실상 선거 이후로 공권력 행사를 미룬 셈이다.
공권력 투입에 따른 강제 연행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농민들의 고립은 더욱 심해졌다. 이날 경찰의 행동은 ‘두물머리 고립 작전’을 방불케 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부터 두물머리로 들어오는 차량을 통제했다. 진입로 하나만 차단하면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농민들의 농성 소식을 듣고 찾아온 환경단체 회원들은 두물머리로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유기농 단지의 ‘딸기밭 체험‘을 하러 온 초등학생들도 덩달아 불편을 겪었다.
트랙터 몰고 “청와대로”…그러나 청와대는 멀었다
“봄철 누구보다 바빠야 할 농사꾼들이, 자식보다 소중한 농토를 버리고 아스팔트로 나갑니다.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팔당 상수원 더럽히지 마라’라고 쓰인 펼침막을 앞세워 트랙터 두 대가 시동을 걸었다. 100일 넘게 두물머리에서 릴레이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인 천주교 사제들과 농민 50여 명이 그 뒤를 이었다. 정부의 4대강 사업과 토지 수용 방침에 항의하며 청와대와 경기도청을 향해 ‘트랙터 도보 순례’를 벌이기로 한 것.
그러나 청와대로 가는 길을 멀었다. 이들의 행렬은 채 100미터도 나아가지 못한 채, 경찰 버스의 차벽에 의해 가로막혔다. 농민들은 “평화적으로 도보 순례를 하겠다는 것인데 왜 막아서는 것이냐”고 저항했지만, 경찰은 “도보 순례 역시 미신고 불법 집회”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맨 앞에서 트랙터를 운전하던 농민 노태환 씨는 “1년 전 정부가 4대강 사업 계획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이 싸움이 이렇게 힘들게 진행될지는 몰랐다”며 “그동안 유기 농사를 짓는 게 자랑스러웠는데, 그동안 유기농을 장려하던 정부가 4대강 사업 발표 직후 태도를 바꿔 우리더러 ‘상수원 오염의 주범’이라고 비난할 때 그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 씨는 “우리는 농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들이다. 무조건 농사짓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더욱 친환경적으로 농사짓는 대안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무조건 나가라니 말이 되는가”라고 울분을 토했다.
| ▲ 경찰이 도보 순례를 진행하려는 팔당 농민들을 가로막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 ▲ 이날 청와대로 향하려는 농민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이에는 약간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 ▲ 경찰과 대치 중인 팔당 지역 농민들. ⓒ프레시안(최형락) |
팔당, ‘눈물의 땅’ 되어버린 ‘녹색의 땅’
팔당 지역은 국내에서 유기농의 ‘태동지’로 꼽힌다. 수도권 최대의 유기농 단지로, 수도권의 35만 가구에 친환경 식품을 공급한다. 1975년 팔당호 일대가 상수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뒤부터,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농민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가 유기농이었다.
한 때 정부의 지원도 활발했다. 1995년부터 경기도와 농협은 상수원 보호 차원에서 농민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며 직거래 판로를 열어줬고, 정부는 이곳을 ‘유기 농업 특구’로 지정하고 유기 농업을 적극 권장했다.
농민들의 오랜 노력 끝에, 팔당에서는 2011년 세계유기농대회가 열린다. 상수원 보호 구역이라는 ‘악조건’을 친환경 농업으로 이겨낸 사례가 인정받으면서 아시아 최초로 유기농 대회를 유치한 것.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이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농민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해 “팔당을 세계 유기 농업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팔당의 신화‘는 여기까지다. 지난해 정부가 4대강 사업 계획을 발표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부는 하천 부지의 비닐하우스를 철거해 유기농 단지를 없앤 뒤, 자전거 도로·테마 공원 등의 위락 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로 인해 사라질 면적은 총 21만여 평. 전체 유기농 단지 면적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정부의 느닷없는 발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농민들도 100여 가구에 이른다. 그렇게 ‘녹색의 땅’ 팔당은 한 순간에 ‘눈물의 땅’이 됐다.
두물머리에서 10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팔당공대위 서규섭 집행위원은 “유기농은 땅 속의 생명체와 대화하며 일구는 상생과 평화의 농업”이라며 “정부가 지원금까지 주며 장려하던 유기 농업인데, 이제 와서 4대강 사업을 한다며 우리를 ‘불법 점유자’ 취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 ▲ 두물머리에 투입된 경찰 병력. 뒤로 ‘친환경 농업 특구’라는 홍보 간판이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
| ▲ “우리 이대로 농사짓게 해주세요.” 팔당 농민들이 농성장 입구에 설치한 펼침막. ⓒ프레시안(최형락) |
한편, 이날 팔당 농민들과 천주교 사제들은 오후 2시께 경찰과의 대치를 중단하고 농성장으로 돌아갔다. 팔당공대위는 토지 측량과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이날부터 4박 5일간 철야 농성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농성은 매일 오후 3시에 열리는 천주교 사제들의 ‘생명·평화 미사’와 야간 문화제,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팔당명랑텃밭 가꾸기’ 등의 행사로 진행된다.
팔당생명살림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조합원으로 오랜 시간 팔당 농민들과 인연을 맺어온 김양현 씨는 “팔당 유기농단지는 소비자와 농민이 함께 만들고 가꿔온 공동체”라며 “아이들과의 추억이 살아있는 팔당 유기농단지를 지켜 달라”고 말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00511173837§ion=03
‘중소기업 CEO 보세요, 절세는 이렇게!’
| “가업승계와 상속 증여세, 아는 만큼 누리는 혜택도 커진다” |
| 기사 게재 일자 : 2010-05-09 19:15 |

네 번째 상영회 : 다운로드 해적들* 주최 : 진보네트워크센터 * 주관 : 인디스페이스(http://www.indiespace.kr) * 일시 :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저녁 8시30분 * 장소 : 인디스페이스 (중앙시네마 3관) * 행사순서 o 소개 o 상영작 1 : <코끼리의 꿈(Elephants Dream)> (10분 54초, 2006년) o 상영작 2 : <거인 수컷 토끼(Big Buck Bunny)> (9분 56초, 2007년) o 상영작 3 : <이 영화를 훔쳐라!(Steal This Film)> (2편 : 44분, 2007년) o 토론 : 공유하는 영화 제작을 위한 구상들 * 문의 : 02-701-7687, 홍지(02-701-7687, idiot@jinbo.net)(자료 : 진보네트워크센터)
▲’Big Buck Bunny’(출처 : http://www.bigbuckbunny.org)
▲’Elephants Dream’(출처 : http://www.elephantsdream.org)
▲’Steal This FilmⅡ’(출처 : http://www.stealthisfilm.com/Part2)
중소기업 CEO 보세요, 절세(세금감면)는 이렇게! »« 전자파로 부작용 없이 암 진단 전파 이용해 휴대폰 자동 충전
전원이 없어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아 부팅이 필요없는 컴퓨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초고집적 강유전 나노구조’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구현됐다.
김진곤 포스텍(포항공대·사진) 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2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의 작은 크기에도
강유전체 고유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초고집적 강유전 나노소자 개발에 성공했다고 9일 밝혔다.
연구팀 논문은 과학저널 <나노레터스> 5월호 온라인판에 실렸다.
강유전체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이지만 그 안에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전기적 분극을 지니고 있어
외부에서 전기장이 가해지면 분극의 방향이 바뀌는 물질을 말한다.
철이 그 자체는 자성을 띠지 않지만 자석(자기장)을 갖다 대면 엔(N)극과 에스(S)극의 자성을 띠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강유전체의 이런 성질은 전원을 끊어도 정보를 유지할 수 있는 비휘발성 소자를 개발하는 데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강유전체를 나노미터 크기의 구조로 만드는 일이 어려운데다,
강유전 성질이 유지되는 최대 크기가 60나노미터에 머물러 컴퓨터 제작에 필요한 고집적화가 불가능했다.
연구팀은 ‘블록 공중합체’ 화합물에 강유전 전구체(전단계 물질)가 포집되도록 해 기판 위에 코팅한 뒤 열을 가해
화합물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강유전 나노 입자 구조를 만들었다.
김진곤 교수는 “전원 없이도 저장된 정보를 잃지 않아 부팅이 필요없는 노트북 등을 개발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http://hani.co.kr/arti/science/scienceskill/419958.html
전자파로 부작용 없이 암 진단 전파 이용해 휴대폰 자동 충전 »« 어릴때 뽑은 젖니 보관하세요-잇몸 뼈로 활용
이를 뽑게되면 흔히 지붕 위에 던져 버리는게 우리 관습인데요. 이제부터는 잘 보관해 두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이 든 부모님이 임플란트를 하실 때 ‘잇몸 뼈’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동찬 의학전문 기자입니다
동영상링크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44247
잇몸 뼈가 약해 임플란트 수술을 포기하려 했던 윤석언씨, 아들이 뽑아 준 사랑니 2개가 뜻밖의 선물이 됐습니다.
[윤영진/아들(치아기증) : 효도를 해드린 것도 없고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라서 뭘 딱히 사드린 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된 것 같아.]
[윤석언/아버지(치아수여) : 아플텐데 사랑니를 뽑아줘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도 듭니다.]
임플란트를 심으려면 잇몸 뼈가 두꺼워야 하는데 잇몸 뼈가 얇으면 턱뼈나 골반 뼈를 떼어내거나 동물 뼈를 이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의 필요없는 치아를 이용하면 뼈를 깎거나 동물뼈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김영균/분당서울대병원 치과교수 : 유전적 조합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이식 후 면역 거부 반응이나 기타 감염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사랑니 하나는 30 만원이나 하는 동물뼈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뽑은 젖니도 치아은행에 장기간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뽑은 치아를 지붕 위에 버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젖니는 물론 사랑니도 부모님을 위해 보관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상취재 : 김흥기, 영상편집 : 김경연)
SB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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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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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물론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형사나 검찰 수사관의 전화를 받으니 가슴이 달달 떨릴 거다. 그렇다고 절대 쫄지 마라. 침착하게 대응하고 상세하게 물어라. 우선 종이와 연필을 준비한 뒤 상대방의 소속과 계급, 이름을 물어보고 적어라. 그 다음 당신을 어떤 이유로 소환하는지 꼭 물어라. 고소 사건이라면 고소인은 누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고소했는지 등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물어야 한다. 나중에 수사기관에 출석해도 상대방의 고소장은 수사기관이 절대 안 보여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수사기관에 출석했다가는, 당신이 당한다.
출석하는 당신의 신분이 피의자인지 참고인인지도 꼭 묻길 바란다. 참고인으로 나갔다가 피의자로 둔갑되는 수도 왕왕 있으나, 일단 참고인이면 한숨 놓아도 된다. 하지만 피의자라면 상황이 다르다. 수사기관이 당신에게 죄가 있다고 보고, 여차하면 구속하거나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더 철저히 준비하고 나가야 한다는 거다. 변호사를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상의하라.
실전TIP: 출석 날짜는 형사나 검찰 수사관과 협의하라. 생계 문제 혹은 병원 입원 등 다른 급한 일이 있으면 충분히 설명하고 다른 날짜를 잡아라. 집시법 위반 등으로 소환당한 촛불시민연석회의 전 공동대표 한아무개씨. 애초 5월28일 나오라는 걸 미뤄서 6월9일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했다. 무조건 못 나간다고 하면 잡혀가지만, 납득할 만한 사정을 제시하고 몇 월 며칠에 나가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면 된다.
Q: 별로 내키지 않는데, 안나가면 잡으러 올까?
A: 말로 나오라고 통보하는 이런 형태의 수사, 어려운 말로 ‘임의 수사’라고 한다. 강제로 잡아가는 수사는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고 출석 안 해도 되냐고? 며칠 못 가 판사가 발부한 유효기간 7일짜리 ‘체포영장’ 들고 형사가 당신을 잡으러 다닐 확률 90%다. 나중에 구속영장까지 청구되면, 영장실질심사 때 판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놈, 구속 안 시키면 도망다니고 재판에도 안 나오겠군….” 언제가 됐든 출석은 하라는 얘기다. 세간에 ‘수사기관이 세 번째 소환할 때까지는 거부해도 된다’거나 ‘출석요구서를 서면으로 보낼 때까지 안 나가도 된다’는 소문도 있다. 믿지 마라, 무책임한 낭설이다. 최소 요구 횟수 제한 없다. 전화 통화도 출석 요구에 해당한다.
Q: 조금 전 체포당했다. 어떡하면 좋을까?
A: 역시 침착함을 잃으면 안 된다. 우선 경찰이 당신에게 ‘현행범 체포’나 ‘긴급체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체포당할 때 영장을 보여달라고 하라.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에게 그런 의무, 있다. 동공에 복사라도 하듯, 그 내용을 꼼꼼히 새겨넣어라. 당신에게 적용된 혐의나 영장의 유효기간 등을 따져 적법한 영장인지 판단해야 한다. 체포영장은 대개 7일짜리니, 유통기한이 지난 영장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문제 있는 영장이라면 당신, 체포에 저항해도 된다. 이땐 경찰관을 조금 때려도 공무집행방해로 추가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단, 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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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엔 형사가 ‘미란다원칙’을 제대로 고지하는지 따져보라. 당신을 체포하게 된 범죄 사실의 요지와 그 체포 이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음을 알리고 변명의 기회를 주겠다는 말을 했는가 말이다. 헌법 조문에 나온 이 권리를 알리지 않고 이뤄진 체포는 불법이다.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마구잡이로 체포한 뒤 경찰서 가는 버스에서 미란다원칙을 고지받았다는 증명 서류에 사인을 요구하는 몰상식한 경찰, 아직도 많다. 그땐 과감히 거부하라. 이미 불법 체포가 이뤄진 것이니까. 수사기관에서의 서명은 백번 천번 신중해야 한다. 사인을 안 해도 당신 손해볼 일, 절대 없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그 사실을 잽싸게 일러바쳐라.
실전TIP: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체포적부심사 청구제도를 이용해볼 수 있다. 당사자는 하기 쉽지 않으니, 가족이나 함께 사는 사람 혹은 당신의 고용주에게 부탁하라. 이들 모두 당신의 체포적부심사를 청구할 자격이 있다. 변호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사기관의 체포가 법률적 요건을 어긴 게 밝혀지면, 당신 석방될 수 있다. 체포적부심 청구를 받은 법원은 지체 없이 심문기일을 정하고 심문 뒤 24시간 안에 석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단, 법원이 심문을 위해 수사기관으로부터 관련 서류와 증거물을 넘겨받은 때부터 이를 반환할 때까지의 기간은 체포 기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Q: 경찰서에 도착했다. 형사가 조금 뒤 조사 시작하자고 한다. 너무 떨린다.
A: 체포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경우 △범행 현장에서 범죄자를 체포하는 현행범 체포 △3년 이상의 형이 예상되는 중범죄자를 체포하는 긴급체포가 그것이다. 일단 체포를 하면 48시간 내에 조사를 마치고 풀어주거나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 수사기관은 ‘체포서’라는 내부 서류도 만든다. 체포당한 상황에서 이런 거 떼어볼 정신줄, 웬만하면 없다고 본다. 변호사나 가족, 친지 아니면 회사 사장에게라도 빨리 연락을 해라.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와서 영장이나 체포서를 복사해 적법 여부를 반드시 따져보도록 할 것.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얘기인즉 이렇다. “일단 걸리면 어디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쪽팔리더라도 그래야 한다. 변호사든, 인권단체든, 지인이든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준형 변호사는 “체포 첫날은 본인이 오버하기 쉬우니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고 유치장에서 하루 자며 마음을 가다듬고 이튿날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조사를 받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 경찰이든 검사든 누군가를 체포하면 24시간 안에 피의자의 변호인이나 피의자가 고른 사람에게 피의 사건명, 체포 일시와 장소, 피의 사실의 요지 등을 알려줘야 한다. 이거 안 하면, 위법한 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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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형사가 내 휴대전화 좀 보잔다. 그냥 보여줄까?
A: 체포 기간 중 경찰은 당신이 소지한 물건 이것저것을 보자고 한다. 특히 휴대전화 통화 내역이나 문자메시지 주고받은 것 따위를 보자고 한다. 당신이 거기에 협조할 의무, 전혀 없다. 조금이라도 켕기면, “영장 들고 오라”고 맞받아쳐라. 순순히 내주면 경찰은 그 물건을 일시적으로 압수할 수도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마라. 지난 5월30일 범국민대회 때 현행범으로 체포된 정아무개(27)씨는 경찰이 “당신이 현장에 언제 왔는지 확인하게 휴대전화를 보여달라”고 해서 휴대전화를 그냥 건네줬다. 나중에 석방될 때 “안 보여줘도 되는데…”라는 다른 연행자들 얘기 듣고 뒤늦게 땅을 쳤다는 후문이 전해온다.
Q: 경찰관이 나를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쓰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A: 자, 당신 긴장해야 할 순간이다. 이른바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이라는 거다. 우선 금태섭 변호사가 서울중앙지검 검사 시절 <한겨레> 기고에서 밝힌 “변호사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조언을 기억하라. 왜냐? 이 게임 자체가 정보 보유 측면에서 아주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형사는 당신이 범죄자라는 걸 밝히기 위한 많은 준비가 돼 있는 반면에, 당신은 형사가 나에 대해 뭘 아는지, 무슨 정보를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게임이라고 생각하라. “내 사건은 내가 잘 안다”고 자신하지 마라. 피의자 중 열에 아홉, 수사관들의 회유와 설득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천하의 현직 검사도 피고인석에 앉으면, 머릿속이 하얗다(30쪽 기사 참조). 병 나면 의사 찾듯, 이럴 땐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라.
나중에 구속영장 발부의 빌미가 될지도 모르니, 일단 ‘민증 까는’ 신원확인 절차에는 협조해준 뒤 변호사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 소비자가격 기준으로 변호사가 소환 전 상담 한 번 해주고 조서 작성 때 서너 시간 참석해주는 조건으로 대략 50만∼100만원을 받는다. 돈 아끼지 마라. 여차하면 나중에 수갑 차고 후회하는 수 있다. ‘미드의 본좌’라는 〈CSI〉 봐라. 자기 혐의 드러날라치면 용의자들이 내뱉는 대사 “나한테 변호사가 필요할까요?” 혹은 “내 변호사랑 얘기하세요”.
Q: 변호사 불러봐야 돈만 많이 들 것 같은데,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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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물론 대한민국 현실, 처참하다. 경찰 조사 단계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이는 1만 명 가운데 4명(0.04%)밖에 안 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경찰청 자료, 2007년 상반기 기준). 돈 많이 달라고 할까봐 변호사 못 부른다. 구속 단계 이전에는 국선변호인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전근대적인 형사사법 제도를 가진 나라의 국민이 겪는 슬픔이다. 또, 현장에서 연행돼 조사받는 경우 급하게 구한 변호사가 당신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변호사 없이 조서를 받아야 한다면 두 가지를 명심하라. 첫째, 절대 형사나 수사관을 신뢰하지 마라. “조사에 협조해야 당신의 무죄를 빨리 밝힌다”거나, “얘기를 안 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그들의 말, 전부 공갈 아니면 구라다. 그들의 임무는 당신의 ‘유죄’를 밝히는 것이다. 둘째, 진술거부권을 적극 활용하라. 당신이 수사기관에 적극 협조해야 할 의무, 헌법에도 형사소송법에도 없다. 잘 모르거나 내게 불리하겠다 싶은 부분에서는 무조건 “진술을 거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라. 계속 강요하거나 협박하면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을 읊어주라. 촛불시민연석회의 전 공동대표 한아무개씨도 지난 6월 경찰 조서 작성 때 자신의 혐의와 직접 상관없는 사실 확인, 그러니까 지난해 촛불 때와 관련한 질문 등에는 진술하지 않겠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해 죄가 늘어나는 일을 잘 막았다.
현직 경찰관은 진술 거부권을 영리하게 쓰라고 충고한다. 당신의 혐의와 직접 상관없는 지나간 일들, 사적인 관계, 동료의 혐의사실 등을 물을 때는 묵비권을 행사해도 좋지만, 수사기관이 이미 당신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의 경감급 간부는 “담당 경찰은 해당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하는 경우 증거를 들이밀지 않는 게 일종의 수사 기법”이라며 “이런 경우 진술거부권의 적극적 행사가 나중에 증거 인멸 의도 등으로 해석돼 구속이라는 불이익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전TIP: 이 단계에서 경제적 사정 등으로 변호사를 구하기 어렵지만 꼭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경우, 길이 있다. 우선 각 지방변호사회가 운영하는 당직변호사제도를 적극 활용하기 바란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평일 긴급한 때 접견 및 상담을 요청하면 경찰서로 직접 달려오는 일반당직제도를 비롯해 경찰서 유치장을 찾아가 상담해주는 순회당직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쪽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민변(02-522-7284)에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도 기다리고 있다.
각 지방변호사회 연락처: 서울 02-3476-8080, 인천 032-861-2172, 수원 031-216-0646, 충북 043-284-9683, 대전 042-472-3398, 대구 053-741-6338, 부산 051-508-8504, 경남 055-266-0606, 광주 062-222-0430.
Q: 형사가 빨리 자백하면 집에 빨리 갈 수 있다고 꼬신다. 대충 잘못했다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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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기, 조서 한번 잘못 썼다가 덤터기 쓴 사례를 소개한다. 60대 남성 ㅈ씨. 결코 진보적이지 않은 그, 용산 참사에 열받아 지난 1월24일 새벽 술 취한 상태에서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전·의경에게 박카스병 몇 개 던졌다. 함께 있던 지인들은 인근에 있던 각목을 휘둘렀다. ㅈ씨는 2월1일 체포영장을 들고 온 용산경찰서 형사에게 끌려가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는 과정에서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ㅈ씨도 각목을 휘둘렀다는 일부 전·의경의 주장에 대해 형사가 추궁하자 “애들이 했다고 하니까 제가 그랬나 보죠”라고 사실 아닌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ㅈ씨, 이틀도 지나기 전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5월22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나기까지 110여 일 동안 그는 유치장과 구치소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ㅈ씨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의혹 가는 부분은 부인해야 하는데, 나는 시인을 하는 바람에 자승자박했다”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미 때는 늦었다.
김동국 변호사는 “경찰관이나 검찰 수사관은 ‘인정하면 금방 끝나고, 부인하면 오래간다’며 혐의 사실을 인정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 번 인정해버리면 사실과 달리 (사법적으로) 평가가 된다”며 “대충 맞다고 넘기면 절대 안 된다”고 충고했다.
Q: 피의자 신문조서에 날인과 간인을 하란다. 일일이 읽어보기도 그렇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그냥 찍어주면 되나?
A: 아까도 얘기했듯, 수사기관에서 서명을 하거나 지장 찍는 거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백 번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라. 아직 조서 중심의 재판에서 공판 중심의 재판으로 이행 과정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조서는 재판 과정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생각 이상으로 판사에게 당신의 유죄를 확신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우선 형사가 출력해 준 조서를 글자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라. 내가 한 말과 똑같은지,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조서는 기본적으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적는 게 아니라, 수사관이 나름대로 정리해서 적어놓는 형식이기 때문에 늘 내 생각과 조금씩 다르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꼭, 꼭, 꼭.
그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날인이나 서명을 거부하라. 날인과 간인(혹은 도장이나 서명)이 없는 조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다. 금태섭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자신들이 조서를 공정하게 쓴다고 하지만, 반대로 변호인이 (피의자의 말을) 대신 받아치고 사인해서 증거로 낸다고 하면 검찰이 받아들일 것 같으냐”며 웬만하면 조서에 서명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단, 형사나 검사에게 찍혀 이후 일정이 다소 피곤해질 수 있다는 건 단점이다. 어쨌건, 대원칙은 ‘범죄의 증명 의무는 피의자가 아니라 수사기관에 있다’는 걸 명심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을 필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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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허점은 있다. 검사가 피의자 신문조서를 직접 작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상 검찰청에 소속된 수사관(그들도 사법경찰관이다)이 조서 다 받아놓고는 마지막에 검사가 질문 한두 개 한 뒤 마치 자기가 다 조사한 것처럼 서명을 받는 게 관행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대검 중수부 과장님들께서 직접 신문조서를 받는 일, 우리 같은 서민들로서는 평생 가야 겪을 일 없다. 검사 작성 조서에 잘못된 부분이 나중에 발견되면, 판사한테 “저 부분 조서는 검사가 아니라 수사관이 받은 것”이라고 솔직히 말함으로써 조서의 증거 능력을 문제 삼아라.
Q: 검사나 경찰관이 수사 도중 모욕적인 말을 하는가 하면 서류철로 머리를 툭툭 친다. 인격이 무너지는 것 같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어떡해야 하나?
A: 검사나 검찰 수사관이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모욕적인 말을 하거나 각종 회유와 협박을 하는 일은 여전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피의자가 해당 검사나 수사관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할 수단은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인권 후진국이다.
우선 수사관에게 “이런 모욕적인 상황에서는 더 이상 수사를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을 하라. 동시에 조서에 그 말을 꼭 써넣으라고 요구하라. 그래도 배짱 부리는 수사관에게는 “영상녹화실에서 조사받게 해달라”라고 요구를 하라. 만약 당신이 체포나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받는 상황 아니면, 그냥 자리 박차고 일어나 집에 가버려도 된다. 그리고 그런 구시대적인 수사관은 나중에 모욕죄나 직권남용죄로 고소하라. 몸을 건드렸다면 폭행죄도 추가해라.
반면, 경찰 조사 때는 대처하기가 다소 수월하다. 경찰서마다 설치된 청문감사관실을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을 조사하는 경찰관에게 명백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청문감사관을 만나게 해달라”라고 말하라. 폭언·폭행이 있는 경우, 담당 경찰관을 교체하고 감찰에 들어갈 것이다. 반말 짓거리를 하거나 거듭된 진술 강요 등이 있는 경우, 참지 마라. 화병 된다. 당신이 체포되는 등 강제 수사를 받는 상황이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신 발로 직접 청문감사관실을 찾아가 얘기해도 된다. 또, 경찰서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낼 수 있는 진정서 양식이 구비돼 있으니, 적극 활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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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보고 조사를 더 해야 한다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으란다.
A: 내 집이거니 생각하고 푹 쉬길 바란다. 베개는 물론 모포와 화장지, 칫솔, 치약, 비누와 같은 최소한의 품위 유지 용품은 지급되니, 없으면 달라고 한다. ‘매직’에 걸린 여성들은 해당 물품도 받을 수 있다. 유치장에 들어갈 때는 옷 입은 상태에서 경찰이 간단하게 몸 이곳저곳을 두들긴다. 안마해주는 거, 물론 아니다. 흉기나 뭐 이런 거 갖고 있는지 검사하는 거다. 그런 거 주머니에 있으면 먼저 꺼내서 줘라. 여성의 경우엔 여성 경찰관이 검사하도록 돼 있다. 남성 경찰관이 와서 검사하려고 하면, 당연히 극렬히 저항하길 바란다. 합리적 이유 없이 알몸 검사를 하자고 할 때도 물론 적극적으로 반항하라.
Q: 으악, 형사가 나를 구속 수사하겠다며 오늘 구속영장을 신청한단다. 큰일났다.
A: 수사를 받으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영장주의’다. 판사가 발부한 영장이 없는 한, 국민의 신체 혹은 재산을 함부로 가두거나 뒤질 수 없다. 신체 구속영장의 경우도 판사가 발부 여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단 유념하자. 예전엔 검사가 제출한 서류만 보고 구속 여부를 판단했지만, 요즘엔 판사 앞에 피의자가 직접 나가 실질심사를 한다. 그러니 영장 실질심사 때 판사에게 강력한 믿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죄가 명백하면 일단 인정하되, 당신이 절대 도망가거나 증거를 없앨 생각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라는 점을 잘 설명하라.
Q: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내가 어찌 판사한테 조리있게 설명하란 말이냐?
A: 그렇다. 어느 때보다 당신에게 변호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당신 돈 없는 것 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선변호인을 써먹을 시점이다. 당신이 판사 앞에 서야 하는 때부터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체포적부심 때부터 가능하다는 얘긴데, 체포적부심 자체가 잘 활용되지는 않고 있으니 구속영장 단계가 사실상 최초의 국선변호인 활용 시점인 셈이다. 각 법원마다 국선변호인실을 운영하고 있으니,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국선변호인은 피의자가 이미 구속됐거나 미성년이거나 70살 이상인 경우, 심한 장애가 있는 경우, 사형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경우 법원이 자동 선임해준다. 하지만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황에서도 빈곤 등의 이유로 국선변호인 신청서를 내면, 재판부는 받아들여주는 게 보통이다.
사실 과거 일반 변호사들에게 사건당 얼마씩(현행 30만원)의 수임료를 주고 국선변호인으로 지정하던 때에는 불성실한 변론 등으로 인해 국선변호인에 대한 피고인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일부 변호사가 법원으로부터 월급(세전 800만원)을 받고 국선 사건만 전담하는 제도가 시행된 뒤로는 만족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요즘 항소심에서는 비싼 변호사를 써도 효과를 못 보는 경우가 많은데, 국선변호인이 좋은 결과를 끌어내 (피고인들이 수감된) 구치소에서 화제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실전팁: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전 부모 형제나 지인을 시켜 법원에서 영장청구서를 복사해오도록 한다. 그 안에 당신의 범죄 사실과 구속해야 할 사유 등이 다 적혀 있다. 그걸 보고 당신을 구속해서는 안 되는 사유에 관한 참고자료를 준비하라. 내가 구속되면 내 가족이 굶는다거나, 늙은 노모를 돌볼 사람이 없다거나 하는 등의 사유도 판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도 구속됐다면, 법원에 다시 한번 구속을 풀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른바 구속적부심 제도다. 구속된 사람은 긴장하고 당황해서 이 제도를 활용할 생각을 하기 힘들다. 변호인이나 가족, 동거인, 다니는 회사의 사장 등은 언제나 피의자를 위해 적부심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자신이 중병에 걸리거나 가족이 숨지거나 하는 경우에는 구속집행 정지를 신청하라. 이때는 판사가 검사 얘기를 안 듣고 신속하게 결정한다.
Q: 구속은 되지 않았는데, 결국 기소됐다. 검사가 기어이 내가 유죄라는 걸 입증하고 싶은가 보다.
A: 이제,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단계에 온 거다. 국가가 당신에게 전쟁을 선포한 거라고 보면 된다. 해당 법원이 공소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지만, 검사가 무슨 이유로 기소했는지 빨리 알고 대처하려면 법원에 가서 공소장을 복사하도록 하라. 거기에 당신이 받고 있는 죄명과 적용법조, 공소사실 등이 다 나와 있다. 1차 공판기일까지 검사가 법원에 낸 증거자료들도 검찰청에 있는 공판검사실에 가서 다 복사해 꼼꼼히 챙긴 뒤 재판에 대비해야 한다. 몸이 아플 땐 공판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신청할 수도 있고, 재판부가 마음에 안 들면 기피신청을 할 수도 있다. 이거 다 당신이 하려면, 머리에 쥐 난다. 사선변호인이든, 국선변호인이든, 변호사에게 시켜라.
실전팁: 당신은 죄가 없는데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없이 벌금을 선고받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다. 경찰서장의 요구로 판사가 선고하는 즉결심판과 검사가 약식기소하는 경우다. 승복 못하겠으면, 그 결과를 안 날로부터 7일 안에 법원에 가서 정식 재판을 청구하라. 이때 무슨 일이 있어도 즉결심판이나 약식기소 때의 벌금보다 더 많은 벌금을 선고할 수 없도록 형사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정식 재판 청구도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귀찮을 뿐.
마지막으로 복습 한 번. 수사기관에 쫄지 말고 서명이나 날인 함부로 해주지 마라. 피의자 신문조서 우습게 알다 인생 금 간다. 그러니 변호사 불러라. 국민의 70%가 이런 거 외우고 다니지 않으면 국민 노릇 하기 힘든 시국,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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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뽑은 젖니 보관하세요-잇몸 뼈로 활용 »« 유투브(Youtube) 영상 버퍼링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방법
UCC의 메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얼마전에는 최초의 유투브 영상이 무엇인지 공개되고 이슈화 되면 서 유투브의 역사를 새삼 알리기도 했습니다.초기와는 달리 날로 발전하는 영상매체에 대응하며 유투 브의 경우도 1080p Full HD 규격의 영상을 지원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국내에서 원활한 재생하는게 대단히 어렵다는 거였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은 물론 편법 이 제시 되었습니다. 비디오 악셀레이터를 사용해보고 플래시의 최신 버전 업데이트를 권고했고 또 인 터넷 사업자별 백본망의 용량 때문에 그렇다라는 이유등 여러가지 변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확실한 답을 찾았습니다! 정답은 바로 구글의 공개 DNS를 사용하는 것. 과거 소개드린바 있는 구글의 Open DNS가 실로 대단한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하시죠? 구글의 DNS 주소 참 쉽습니다.
8.8.8.8 8.8.4.4 본인의 로컬 영역에서 DNS 주소를 구글의 공개 DNS로 변경하면 언제그랬냐는듯 통신사업자와는 관 계 없이 유투브의 모든 영상을 한치의 버퍼링 없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그럼 지금 한번 따라해보세요. 윈도 제어판 – 네트워크 연결 – 로컬 영역 연결을 클릭합니다. 그안에 속성 버튼을 누르면 아래와 같은 화면이 나올텐데요. 인터넷 프로토콜 (TCP/IP)를 더블클릭 합니다. (윈도 7 사용자의 경우에는 프로토컬 버전 4 에서 설정하 면 됩니다) 다음 DNS 서버 주소사용 을 클릭 하면 DNS 서버 주소를 직접 입력할 수 있는데
구글의 DNS 주소는 8.8.8.8 / 8.8.4.4 를 넣어주고 확인을 누릅니다.
5월 8일자 ‘레프트 21′ 1면ⓒ 레프트21 PDF캡쳐시민 6명은 7일 저녁 9시40분께 서울 서초구 역삼동 강남역 인근 골목에서 주간지 ‘레프트21′을 판매하던 중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나타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됐다. 이들이 판매하던 ‘레프트21′ 1면에는 ‘안보 위기는 사기다’라는 헤드라인이 크게 적혀 있었고, 이명박 정권이 천안함 사고를 빌미로 안보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 중 한명이었던 신명희 씨 증언에 따르면 저녁 7시 40분께 경찰 2명이 ‘신문을 한번 보겠다’며 다가와 신문과 가판대에 함께 있던 소책자들을 모두 훑어본 뒤, 사진 채증을 했다.
그러자 이들은 ‘거리에 혼란을 준 것이라면 접고 돌아가겠다’며 철수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이들은 가판대를 모두 정리한 뒤, 각자 집으로 복귀하고자 지하철 역을 향했으나, 경찰은 ‘책임자가 와서 신문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며 이를 저지했다.
불시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시민들이 “그렇게까지 확인하려는 근거가 뭐냐”고 묻자, 경찰 중 한명은 대뜸 “사상이 검증되지 않은 신문은 못 팔게 돼 있다. 상부에서 와서 신문들의 사상을 검증해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경찰이 현장에서 이런 검증을 영장도 없이 집행할 수 있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고, 이에 경찰은 “원래 경찰은 다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며 막무가내로 맞섰다.
이들은 “신문에 전화번호도 있고 사이트 주소도 있으니 확인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을 하라”며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지만, 경찰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보내줄 수 없다”며 완강히 저지했다.
이후 사복 형사와 여경을 포함한 경찰 20여명은 시민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강남촛불 회원 10여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복귀를 저지했다. 신명희 씨는 “화장실 가는 것 까지 따라가면서 집요하게 쫓아다녔다”고 말했다.
2시간 가량 사실상 고립상태에 있던 시민들은 연좌에 들어갔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이 다가와 ‘야간 집시법을 위반했다’며 시민 6명 전원을 연행했다. 이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음에도 경찰은 이들의 사지를 들어 경찰차에 강제로 태웠다.
연행된 신 씨는 “레프트21′이 창간된 이후 통상적으로 별 문제 없이 해 오던 것을 이제 와서 집시법을 핑계로 이런 조치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다”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 씨는 “그냥 위협을 하려는 것인지, 건수를 잡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선거를 앞두고 국보법 위반 사건을 하나 만들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현재 시민 6명은 전원 서초경찰서에 연행됐으며, 이들이 판매하던 신문과 소책자 등은 모두 압수된 상태다.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개인정보 내다 판 돈 공무원 |
2010-05-08 12면 기자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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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돈을 받고 개인 주민등록 관련 정보를 넘겨 준 구청 공무원과 신용정보회사 직원, 이를 내다 판 무허가 심부름센터 직원 등 51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는 7일 윤모(57)씨 등 서울 모 구청과 주민센터 공무원 2명 등 5명에 대해 수뢰후부정처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심부름센터 운영자 최모(58)씨를 뇌물공여 등 혐의로 구속했다. 또 의뢰인 신모(41)씨 등 4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윤씨는 지난해 7월 의뢰인 신씨의 헤어진 여자친구 최모(42)씨의 제적등본과 주민등록 관련 자료를 넘겨주는 등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최씨에게 건당 1만원씩 받고 700여차례에 걸쳐 개인정보를 빼내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다른 공무원 정모(50)씨는 최씨에게 개인정보를 주면서 한 달에 50만~70만원씩 모두 1800만원을 챙긴 혐의다.
또 심부름센터들은 적게는 20만원에서 많게는 300만원을 받고 휴대전화번호 등 단순한 개인정보 제공은 물론 사생활 추적과 협박, 청부폭력 등 ‘범죄 해결사’ 노릇까지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심부름 센터를 찾은 의뢰자 37명 중에는 의사·변호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으며 대부분 과거 애인의 근황이나 배우자의 불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심부름센터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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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디넷코리아]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은 여전히 대부분 이용자들에게 ‘큰 맘’ 먹고 즐겨야 하는 장르다. 게임을 잘하는 이용자에게는 게임 내에서 제일 잘나가기 위해서 생각할 것이 많고, 못하는 이용자는 익숙치 않아 배워야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MMORPG에 도전한다. 남들이 말하는 파레이도 해보고 싶고 길드를 만들어 공성전이라는 것도 해보고 싶어서다. 그래서 남들 다한다는 유명한 몇몇 MMORPG를 알아보지만 세상에…. 그동안 서비스를 통해 업데이트 된 것이 너무 많다. 숫제 책을 펴놓고 공부라도 해야될 판이다.
그래서 노려볼만한 게임이 신작 게임이다. 다른 사람들과 동일 선상에서 시작할 수 있고 게임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나갈 수 있다. 여기에 조작이 쉽고 기존 게임과 비슷해 익숙하면 금상첨화다.
지난 5일 어린이날 초기화 없는 사전공개서비스, 다시 말하면 오픈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소프트의 신작 ‘에다전설’은 이러한 조건에 잘 부합하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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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전설’은 ‘루나온라인’, ‘아이리스온라인’, ‘엔젤러브 온라인’ 등으로 저연령층 및 여성에게 적합한 MMORPG는 무엇인지를 보여준 이야소프트가 내놓은 차기작이다. 대작이라고 말하기는 뭔가 부족하면서도 이야소프트 만의 색깔이 잘 묻어나는 느낌이다. 일본 게임사로 비유하면 마치 신천마계 시리즈로 유명한 아이디어팩토리를 연상케 한다. 메이저는 아닌데 마니아는 결코 적지 않다.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올림푸스와 티탄의 두 신들의 전쟁을 다룬 ‘에다전설’은 짜임새 있는 콘텐츠와 다양한 즐길거리 그리고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한데 어우러지며 수준급의 완성도를 갖춘 게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점 고정 “생각보다 편리하네”
‘에다전설’을 처음 플레이하면 시점 변환이 되지 않는 사실에 한번 놀라게 된다. 3D 그래픽임에도 불구하고 시점을 45도 위로 보는 쿼터뷰 방식으로 고정시켜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맵 크기나 건물은 커서 종종 시야를 가린다. 물론 가릴만한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배경이 투명하게 처리되면서 플레이하는데 큰 지장은 없지만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게임을 좀 더 플레이하다보면 시점변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편리하다는 점에 한 번 더 놀란다. 방향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시점이 자꾸 바뀌다보면 여성이나 저연령층 이용자들은 길을 헤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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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 변환이 되지 않아 좋은 점은 또 있다. 마우스만으로 조작이 간편하다. 물론 전투를 할 때는 키보드를 사용해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조작을 마우스로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부분은 ‘리니지’나 ‘뮤’ 등 초창기 MMORPG를 즐겨온 아저씨들이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작은 배려가 게임 이용자들로 하여금 게임을 계속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물론 시점변환이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에다전설’의 이러한 시도는 여타 게임과 차별화되는 신선한 요소로 다가온다.
■까다롭지 않은 훈남같은 그래픽
‘에다전설’의 또 다른 장점은 그래픽이다. 머리와 몸이 절반씩 차지하는 2등신 캐릭터 임에도 불구하고 묘사가 상당히 정교하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자신의 입맛에 꾸미는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전체적인 배경 묘사나 광원의 처리도 눈을 즐겁게 한다. 파스텔톤의 카툰 랜더링 그래픽에서 광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는 내내 하늘에서 햇빛이 내려쬐는 듯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물론 시점조작이 되지 않아 실제로 해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한 마디로 ‘에다전설’은 눈코입이 각각 잘생겨서 미남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훈남에 가깝다. 게다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잘해주는 매너 좋은 훈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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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것이 ‘에다전설’의 컴퓨터 사양은 상당히 낮다. 권장사양이 펜티엄4 1.8Ghz다. 요즘 펜티엄4 CPU가 나오지 않는 관계로 지금 쓰는 CPU로 설명하면 넷북서 사용하는 아톰 1.6Ghz 정도 된다. 그래픽카드 역시 라데온9200이나 지포스4 정도면 된다. 그래픽카드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요즘 나오는 내장 그래픽카드도 이들 보다는 성능이 좋다.
이야소프트가 ‘에다전설’과 같이 게임을 저사양으로 개발하는 이유는 비단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특성은 시점을 고정한 것과 더불어 초보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익숙함과 신선함이 공존
‘에다전설’의 전체적인 시스템은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닮았다. 캐릭터 생성시 양대 진영으로 나뉘는 것도 그렇고 스킬이나 아이템 그리고 퀘스트 진행 방식 등도 그렇다. 물론 최근 트렌드나 몇 년간 출시된 거의 대부분 MMORPG도 그렇기에 표절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닮은 점 만큼이나 차별 점도 많다. 우선 맵 자체가 일직선이다. 여러 지역을 넘나들면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레벨업에 따라 그 다음 단계의 지역으로 넘어 가는 방식이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이 역시 앞서 설명한 요소와 마찬가지로 접근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진영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기에 생기는 시스템도 눈길을 끈다. 가령 아군 측 진영의 활약에 따라 전체 캐릭터에게 주어지는 각종 혜택(이른바 버프)은 소속감을 더욱 높여주며 이후 이어지는 진영 간 집단 전투인 ‘성물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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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에게 MMORPG를 추천하라고 하면 ‘아이온’이나 ‘월드오브워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유명한 개발사가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만큼 제작비도 많이 투입된 게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게임 이용자가 이들 게임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게임 이용자들의 입맛은 놀라울 정도로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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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에 실렸던 명판(名板)의 설계도. 파이어니어 10호는 1972년 3월 3일 발사돼 처음으로 소행성대를 탐사하고 목성을 관찰한 우주선. (AP=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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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호킹 박사 (AP=연합뉴스, 자료사진) |
그가 최근 TV에 출연해 외계인에게 납치된 적이 있다고 한 발언이 화근이다.
5일(현지시간)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에 따르면 일륨지노프는 지난달 26일 황금 시간대의 한 TV 쇼에서 외계 우주선으로 납치돼 노란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과 만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는 “몇 시간을 외계인과 함께 보냈다”고. 그에 따르면 외계인들이 1997년 9월 18일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당시 잠자리에 든 일륨지노프는 발코니 너머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반투명 반튜브’ 형태의 우주선이 있었다.
그는 우주선 안에서 노란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들과 조우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외계인들은 우주선 내부를 구경시켜줬다.
일륨지노프는 “외계인이 지구에 온 것은 샘플을 채취하기 위함이었다”며 “목격자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러시아 국가두마(하원)의 안드레 레베데프 의원은 “일륨지노프가 국가기밀을 누설했을지 모르니 당장 조사해야 한다”고 발끈했다.
레베데프 의원은 “정치인,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기밀 접근권을 가진 정치인들이 외계인에게 납치됐을 때 취해야 할 행동강령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게 자신이 우려하는 바에 대해 일일이 열거한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백만장자 기업가 출신인 일륨지노프는 독특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세계체스연맹 회장이기도 한 그는 가난한 칼미키야 공화국에 수억 달러를 쏟아 부어 체스의 메카로 탈바꿈시켰다.
카스피해(海) 서북쪽, 볼가강(江) 하류 서쪽에 자리잡은 칼미키야 공화국은 1992년 3월 신연방조약 체결로 탄생했다. 이전에는 칼미크 자치공화국으로 불렸다.
주민은 몽골족에 기원을 둔 칼미키야인들이다.